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콤니노스 왕조 (문단 편집) === 제국의 위기는 가문의 기회 === 제위는 의외로 빨리 되돌아왔다. [[이사키오스 1세]]의 후임이던 [[두카스 왕조]]의 황제들이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이었다. [[콘스탄티노스 10세]]는 [[콘스탄티노스 9세]]가 병합하였지만 군축과 동시에 동화정책 및 사민정책이 맞물려 자위능력이 거세된 제국령 아르메니아와 900년대 중반 이후 한 번도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은 제국의 근간인 아나톨리아를 [[셀주크 제국]]이 점령하고 침탈하는 와중에도 전략적인 오판으로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. 콘스탄티노스 10세가 말년에 와병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망하고 아나톨리아 동부의 거점 도시인 케사리아(Kaisareia)가 함락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제국인들의 추대로 전임 황제의 황후와 결혼하여 뒤를 이은 군인황제 [[로마노스 4세]]는 제국방위에 진력하여 얼마간 성공하는 듯 하였으나 무리하게 일으킨 원정에서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배반 끝에 [[만지케르트 전투]]에서 대패, 제국의 중앙 야전군을 날려버리고 아르메니아를 셀주크 제국에 넘겨버리게 된다. 그리고 대망의 하이라이트인 [[미하일 7세]]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제위에 올라 채 서른도 못 되었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실패를 거듭하여 경제혼란, 반란, 영토상실, 정치혼란 등을 겪은 끝에 군사령관들의 반란을 맞아 폐위되었다. 이런 대혼란의 와중에 제국 서부와 동부에서 각각 [[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]]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 중 아나톨리아콘 테마 사령관이던 보타니아티스가 먼저 수도로 접근하여 두카스 가문의 도움으로 입성, [[니키포로스 3세]]로서 제위를 차지하고 콤니노스 가문과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도움을 받아 브리엔니오스를 물리쳤다. 그러나 노령의 찬탈자는 당면한 문제해결에서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으며, 미모의 젊은 전 황후[* [[알라니아의 마리아]]. 조지아 왕국의 왕녀로, 미하일 7세와 니키포로스 3세의 황후이다. 지모를 겸비한 것으로 유명하였으며, 2살 연하의 [[알렉시오스 1세]]를 정부로 두고있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다. 다만 이러한 식의 '미망인 황후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' 따위의 소문은 굉장히 흔했다.]를 취하고 [[포르피로게네투스|포르피로옌니토스]]였던 황자를 후계에서 내치는 등의 행위를 벌여 점점 인기를 잃어갔다.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람들은 무능한 노황제보다는 그의 밑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외침을 막는 등 두각을 드러내던 콤니노스 가문의 형제 --[[이사키오스 1세]]의 조카-- 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